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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계엄군 김무성 대위와 암매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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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영
등록일
2019-03-30 14:16:33
조회수
875
1980년 광주 5.18 당시 박근혜, 김무성 도청 앞 시위 군중에게 백린포탄을 발포하여 150여명을 살육하다.


1980년 5월 19일 밤 12시 광주공설운동장에 요란한 굉음을 내는 대통령 전용헬기가 착륙하였다.
헬기에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장세동이 내렸다. 박정희 일행은 전남도청을 잠시 들러 도지사로부터 상황보고를 받고 조선대에서 12시간 머물다 5월 20일 13시 2군단 특전공수여단 702특전공수연대 1대대 1중대 부대원들이 정비한 전남대 특전공수부대 주둔지로 이동하였다.
전남대는 5.18 진압작전이 끝날 때까지 지휘본부가 되었다.

조선대에 2군단 특전공수여단 701특전공수연대(강원도 춘천 사창리 인근)1대대가 주둔하였다. 당시 701연대장이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인 이종찬 이었다.
당시 이종찬 대령은 조선대 무역학과 학생회의실에서 부하간부 10여명(이병기 중사 등)이 여대생 15여명을 집단강간을 목격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후 이종찬 대령은 ROTC 학군단 장교출신으로 대한민국1호 장성이 되었다.

2군단 특전공수여단장이 박세직( 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준장이었다.
박세직은 1973년 4월~1974년 9월까지 2군단 특전공수여단장이었던 전두환 준장의 참모였던 인연으로 전두환이 명하여 1980년 광주 5.18 진압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통령 문재인( 1974년~1977년 3월까지 군복무)은 특전사령부 예하부대에서 대학 재학시 학생운동 전력으로 2군단 특전공수여단으로 전출되었다. 1974년 7개월간 2군단 특전공수여단장 전두환의 관사 당번병으로 보직 받아 이순자의 관사 가사도우미로 복무하였다.

전남대에 주둔한 당시 702특전공수연대장이 최세창(본적: 경북 김천, 전 국방장관) 대령이었다.

702특전공수연대 1대대(강원도 춘천 오음리) 부대장 김진현(본적: 경북 청도, 육사 25기, 육군사관학교 일반대학 의탁교육 생으로 선발되어 서울대학교에서 2년 수학하였다. 인터넷에 뜨는 경력사항에 서울대학교 졸업이라고 허위기재하였다. 1988년~1993년까지 안기부 제3국 과장에서 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서울시립대 총장이 되었다.)중령이었다.

당시 1대대 1중대 1소대장이 김관진(본적 : 전남 광양, 전 국방장관)중위였다.

특전공수부대원들은 부대명칭을 표시하는 비표와 관등 성명을 떼고 작전에 참여 하였다.
현재 광주 5.18 재단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대부분 위조된 것들이다.

박정희는 미국에서 귀국하는 대한항공기 기내에서 1980년 5월 19일 01시부터 실탄지급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전두환은 시위진압작전의 총사령관인 박정희를 총통각하로 예우하고 자신은 사령관각하로 불리었다.

1980년 5월 20일 밤 21시경 최세창 대령, 장세동 보안사 작전참모장과 박근혜 외 702특전공수연대 1대대 1중대 1개 소대가 전남도청 탈환목적으로 도청에 접근하였다. 전남도청탈환기습작전이었다. 도청정문에서 보초를 서는 한 시민군이 공수부대에게 칼빈총 4발을 격발하였다.
공수부대원 2명이 사망하고 탄환 1발이 공수부대원 옆에 서 있던 박근혜의 어깨를 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박근혜의 어깨에서 피가 흐르자 최세창과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로 퇴각하였다.
박근혜의 어깨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 박정희는 분노에 휩싸여 그 이후로 시민군에 대한 총살을 명령하였다. 대량학살의 시발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총상을 입은 박근혜를 치료하기 위해 전남기독병원 의료진이 왔다. 기독병원 의료진의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두환은 그 순간을 옆에서 지켜봤다.

1980년 5월 21일 아침 9시 전남대 부근으로 공수부대를 쫓아온 시위대에 격분한 박정희는 검붉은 양복을 입은 채로 M16소총으로 총알이 없는 칼빈 소총을 들고 도망하는 시민군과 시위대를 향하여 조준사격하여 30여명을 사살하였다. 전두환은 박정희 옆에서 탄창을 준비하는 등 박정희를 보조했다.
당시 M16소총을 소지한 5.60대의 키작은 남성과 장교복을 입은 전두환을 목격한 목격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한사람이 현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소강석이다.
박정희에게 쫓긴 시민군인 소강석은 죽은 척하려고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들켰으나 “넌 나를 보았다는 말을 하면 죽는다”라고 말하고 살려주었다. 옆에 있던 전두환이 소강석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2시부터는 전남대 앞에서 금남로에 이르기까지 박정희의 명을 받은 702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장인 김관진 중위와 정영철(정윤회)중사 외 5명이 시위군중 70여명을 총 칼로 학살하였다. 정윤회(본명:정영철)중사가 M16 소총을 자동으로 전환하여 난사하였다. 30여명이 사망하였다.
부대원들의 인사기록 사진과 5.18 영상자료를 비교 분석하면 이들의 신원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날 박정희는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하여 1980년 5월 21일 14시에 육군지원단을 동원하여 헬기사격명령을 포함한 공군작전명령을 내렸다. 미국의 만류로 중단되었다. 1980년 5월 21일 14시 전일빌딩 옥상에 대한 헬기사격이 이루어졌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3시 박근혜는 발칸포 장갑차 발포명령자리에 앉아 도청 앞 시민군과 시위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차 바로 옆에서 702연대 연대본부 작전과 소속 김무성 대위가 광주에서 박근혜 수행비서인 장세동 대령이 자리를 비운사이 박근혜의 수행비서 대리를 하였다.

트럭에 올라탄 시위대 중 2~3명이 “박정희다.” 라고 소리쳤다. 죽은 박정희가 서울에서 광주에 내려왔다는 정보를 권노갑과 고 김상현이 주요 시위자들에게 퍼트렸다. 감옥에 갇힌 김대중이 풀려날 수 있는 방도라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한화갑에게서 증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김무성 대위가 이 소리에 놀란 발칸포 전차 옆에 서 있던 박정희의 얼굴을 보았다. 김무성이 재촉한 발걸음으로 박정희에게 다가서며 “백린탄으로 쓸어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고언 하였다.
박근혜와 김무성의 40여년 인연의 시작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는 1980년 5월 21일 14시 10분 박근혜에게 지시하여 발칸포 장갑차 사수가 시민군과 시위군중에게 백린탄 5발을 발사하게 하였다. 이 백린탄으로 15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1980년 5월 21일 저녁 7시부터 702특전공수연대 1대대 1중대 부대원들이 박근혜의 백린포탄으로 사망한 시위대 150여구의 시신과 금남로 등에서 숨진 400여구의 시신들을 5월 22일 저녁 10시까지

전남 광주시 북구 야산( 장세동 부인 소유지~1984년 전두환 처남 고 이창석으로 소유권이전~1994년 말 국유지로 전환, 현재 광주 5.18 민주화 기념묘지 헌화탑 터 )에 구덩이를 파고 시신들을 던져 넣었다.
그 위에 봉분 3기를 놓았었다.
당시 시신 매장작업에 동원된 1중대원들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김진표(본적: 경기 화성 봉담면.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는 중앙정보부에서 1980년 5월19일 정찰요원으로 설훈(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함께 광주에 파견된 인물이었다.
김진표는 702 특공대원들에게 광주 북구 암매장지로 끌려가 생매장 될 찰나에 김무성 대위에게 중앙정보부요원 신원조회를 요청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현종
당시 암매장 작업을 한 1중대원 중 1명이다.
현 문화일보 객원 논설위원으로 현재 채널A와 MBC 2시 뉴스에 출연 중이다.
당시 이현종은 이등병이었다.
이현종은 1992년 충청도 출신 부사관 4명과 강원도 출신 부사관 2명이 병사 10여명과 함께 광주 5.18 암매장지를 고발하기 위해 KBS 등 언론사들과 인터뷰 섭외할 때 안기부에 밀고하였다. 이일로 안기부는 부사관들과 10여명 병사의 팔을 절단하여 불구자로 만들었다. 국정원으로부터 월 500만원 받는 인물이다.

당시 현장 지휘관이 702특전공수연대 연대본부 작전과 김무성 대위와 1대대 부대장 김진현 중령이었다.
현재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백승주는 육사 38기로 당시 육군참모부에서 파견된 백승주 소위이었다.

1980년 5월 24일 오전 10시 전남 광주 용두동성당 조비오신부와 염수정(현 천주교 추기경)보좌신부가 박정희의 요청으로 암매장 터에서 위령미사를 봉헌하였다.
전두환이 조비오신부를 ‘성직자의 탈을 쓴 사탄’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비오신부와 염수정 추기경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에도 국민 앞에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안기부와 국정원으로부터 월 500만원 받았다.


1994년 남산 안기부는 광주 5.18 정리계획으로 1994년 말부터 암매장터지상에 5.18 민주화 기념묘지탑을 조성하여 암매장터를 영구히 은폐하였다.
박근혜 제1국장의 아이디어였다.

1994년 안기부 제3국 김진현(본적: 경북 청도, 김진현의 친부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출신으로 김진현이 6세 때 경북 청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성남시장 오성수의 뒤를 이어 제3국장이 되었다. 광주 5.18 당시 전남대에 주둔한 702 특전공수연대 1대대 부대장 김진현 중령이다. 1995년 서울시립대 총장이 되었다. )국장이 1994년 5.18 민주화묘지 조성 책임자였다.

추미애(현 더불어민주당 대표)보안과장과 정청래(현 더불어민주당)가 주무관이었다. 5.18암매장터 기밀 보안담당이었다.

기념묘지 터파기 공사 중 시신 20여구의 유골이 나왔다. 당시 현장 공사소장의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암매장터 바로 위에 레미콘 2대 분량의 콘크리트를 부어 다졌다.

2018년 현재 광주광역시 북구 5.18 민주화 기념묘지 헌화탑 바로 지하가 남녀 550여구의 시신이 묻혀있는 암매장터이다.
현재 기념묘지에 있는 묘는 대부분 시신 없는 묘지들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시설관리공단에서 민주화기념묘지 보수공사 중 유골 40여구가 발견되어 화장처리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은 이 날 오후 2시경부터 전남대 부근에서 죽은 100여구의 시신을 전남대로 옮겼다. 시신들은 주민등록 소지자 70여명과 미소지자 30여명이다. 시신 중에는 경상남도 하동 부부 2명, 충북 청주 1명이 있었다. 사망자명단은 최세창이 가지고 있다.

1980년 5월 22일 새벽 2시부터 박근혜와 최세창 대령의 지시로 702특전공수연대 1대대 1중대 공수부대원들이 시신들을 벌목용 톱으로 절단하여 전남대 뒤 소각장에서 화염방사기로 약 2시간에 걸쳐 소실하였다.
박정희는 시신소각 중 익은 살점을 떼어 오라고 한 다음 두어 점을 입에 넣고 씹었다. 박근혜 일행도 한점씩 입에 넣고 씹었다.

시신타는 냄새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관계로 소실을 중지하고 1중대 대원들이 남은 70여구의 시신을 5월 22일 저녁 9시 전남 광주 북구 암매장 무덤 옆에 묻었다.
약간의 남은 뼈조각은 금남로 하천에 버렸다. 당시 전남대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의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5월 22일 광주교도소 외곽 가로수 옆에 매장한 시신은 11구이다. 전북 임실 부부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부 1명은 광주 북구 임야에 묻혀 있었다. 1992년 10월 최세창이 국방부장관으로 재임할 때 채굴하여 화장해 가로수 옆에 뿌렸다. 가로수 조경공사 명목으로 작업하였다. 교도소 근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5월 20일 저녁식사와 5월 21, 22일 아침, 점심, 저녁식사를 전남대 부근 국밥집에서 식사를 하였다. 전두환은 박정희를 전남대 청소부로 소개하였다. 후일 안기부(현 국정원)는 돈을 주고 국밥집 아주머니의 입을 단속하였다.
후에 국밥집 여주인들, 당시 시민군 이었던 소강석 등 5.18 주요 인물들은 안기부 관리명단(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려졌다.

1990년 광주 5.18에 대한 국회의 특조위가 발동되고 여론이 거세지자 보안사는 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광주 5.18 당시 전남대에 주둔한 701, 702특전공수연대 1대대 간부들과 병사들 중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정리계획( 백화사업, 당시 백화사업(가칭) 책임자가 안기부 제3국 보안과장 이병호(박근혜 정부 때 국정원장이 되었다.)이었다.
광주 5.18 당시 2군단 특전공수여단 702특전공수연대 1대대 1중대 중사로 전남대에서 작전에 참여했던 김원웅 중사(본적: 충남 청양, 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김진태의 아버지이다.)는 1990년 소령으로 춘천 오음리 2군단 특전공수여단 702특전공수연대 1대대 부대대장으로 근무하였으나 광주 5.18 당시 박정희를 목격한 인물로 경상도 외 출신으로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지목되어

1990년 7월 5일 밤 10시 안기부 작전1과 김무성(2군단 특전공수여단 702특전공수연대 본부에서 1974년 말~1981년 말까지 군 복무한 자다.)과장, 작전3과 과장 이병기외 2명에게 부대 밖 오음리 술집에서 독침으로 암살당했다. 시신의 입술이 검붉었다.
당시 술집 여종업원 정00가 김무성과 이병기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하사계급 이상 간부로 충청도 출신 4명, 강원도 출신 2명이 암살당했다.
현재 김진태는 자신의 아버지가 근무 중 과로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병기
본적: 전북 익산
이리공고 졸업 후 하사로 입대
1980년 5월 광주 조선대에서 701특전공수연대 1대대 소속 군수계 이병기 중사로 조선대 여대생을 집단 강간한 인물이며 화염방사기를 수송.보급했다. 1982년 남산 안기부에 입사하여 제1국과 제2국을 오가며 살수로 활동하였다.
후일 국정원장과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다.

백옥자
본명: 백경숙
본적: 전남 광주
광주 5.18 당시 조선대 불문학과 재학
조선대에서 강간당한 여대생 중 한명이 현재 KBS2 ‘살림남’에 출연하는 연애인 김승현의 친모 백옥자이다. 당시 조선대 불문학과 여대생이었다.
전여옥과 조선대학교 불문학과 선후배이다.
광주 5.18 인연으로 1985년 안기부에 특채되어 활동하였다.
1987년 KAL 858기 폭파공작 당시 안기부에서 1차 선발조로 문재인 기획조정실장과 함께 이라크 바그다드 주재 한국대사관에 파견된 인물이다.
1997년 안기부에서 전남 광주시청에 전보하여 2003년까지 근무하였다. 2007년에 경기 김포로 이주하였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 광주 5.18 관련 첩보 보고가 임무인 국정원 기관원으로 활동하였다.
김대중 정부 가칭 ‘과거사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출석하여 강간당한 사실이 없다고 허위진술을 하였다.

702특전공수연대 장병들은 평상시 인민군 복장과 AK소총을 소지하고 북한군으로 위장하는 훈련을 한다. 여기에서 역발상을 한 702특전공수연대 출신인 안기부 김무성(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제1국 주임이 1984년 북한군 개입설을 기안하여 박정희가 받아들였다.
1984년 7월 남산 안기부 제3국 3계장 지만원(보안사에서 파견나온 인물)이 담당하였다.
1982년 의령학살 때 북한에서 데려온 인민군 박지원(현 민주평화당 국회의원), 강명도, 김흥광, 조명균(현 통일부 장관)은 광주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였다는 안기부의 공작 시나리오를 작성하는데 동원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진상위원회 ‘광주 5.18 특별분과위원회’에 민간인 참여위원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1992년 1월 안기부와 안기부 출신 변호사들의 정치공작 일환으로 출범하였다. 타 변호사들과 지식인들이 시민대표라는 이름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참여연대 또한 국정원 정치공작으로 출범한 명목상 시민단체이다. 국정원 간부들의 신분 위장수단으로 이용되고 정치인이 되는 코스가 되었다.)출신인 김남근, 장유식(현 국정원개혁위원, 이수희와 고려대 동기)변호사가 참여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1988년 노태우 정권부터 2017년 문재인 정권까지 30년을 ‘광주 5.18’에 대한 수많은 정치인들의 기자회견과 KBS. MBC. SBS 등 방송사의 기획보도를 보고 들어왔다. 언제까지 보고 들어야 하나?
작성일:2019-03-30 14:16:33 222.99.77.65